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게임기 브랜드. 약칭은 PS, 플스.
거치형 게임기에 한해서는 PS3 단 한 기종을 제외하고는 5세대부터 8세대까지 모두 세계 시장에서 승리한 기종들이다. 2018년에는 PS1~PS4, PSP, PS Vita까지 모든 시리즈 누계 5억대를 돌파했다. 2019년 12월 3일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가정용 콘솔 브랜드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탄생 배경
1975년 소니에 입사한 쿠타라기 켄은 1983~1988년 가나가와현 아츠기시에 있는 소니 정보처리연구소 소속 시절 방송국용 실시간 3D 특수 효과(VFX) 시스템인 '시스템 G'의 데모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생방송에 실시간으로 3D 효과를 넣을 수 있는 장치인 시스템 G를 보며 쿠타라기는 '이걸로 가정에서 게임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시스템 G를 가정용 게임기로 만들려면 2만 개의 LSI가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쿠타라기는 무어의 법칙이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1994~1995년 정도에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런 쿠타라기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으로 닌텐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며 쿠타라기는 게임 사업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관여한 2인치 플로피 디스크 시스템을 납품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슈퍼패미컴에 PCM 사운드 시스템을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1987년 양사 간에 2박 3일 동안 합숙을 하며 쿠타라기는 여러 제안을 했고 차세대기에는 CD-ROM을 사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989년 슈퍼패미컴 개발이 막바지일 때 다시 한번 제안했지만 내키지 않았던 닌텐도는 대신 소니에게 '슈퍼 패미컴의 외장형 CD-ROM 드라이브'와 소니만의 자체적인 일체형 머신을 만들 수 있게 해 줬다. 그래도 마루야마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게임기 비즈니스가 아닌 '외장형 CD-ROM 드라이브'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1991년 5월, 사장이 되기 전 홍보이사였던 이데이 노부유키와 교토로 향하던 쿠타라기는 닌텐도와의 제휴가 깨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우 찾아간 닌텐도에서는 아라카와 미노루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사장[이 둘을 맞아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우리는 필립스와 일을 할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며칠 뒤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 소니 아메리카에서는 그대로 공개를 강행했지만 그다음 날 닌텐도는 필립스와의 제휴를 발표함으로써 소니에게 망신을 주어 마찬가지의 일이 되풀이되었다.. 뉴욕 타임스 기사 이미 1991년 초에 아라카와가 필립스를 오가며 협의를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왜 닌텐도와의 계약이 깨지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 계약 당시 CD-ROM에 관련된 수익 배분 문제나 플랫폼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에 두려움, 쿠타라기의 고집스러운 협상태도나 마루야마는 게임 이외의 것은 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가정용 가라오케나 독점해 볼까라고 했다고 말은 하지만 당시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중이던 소프트[13]가 야마우치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등의 소문이 도는 정도이다. 또한 여기에는 소니의 CD-i사업부까지 쿠타라기의 사업을 깨기 위해 닌텐도-필립스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관계자들은 대체로 소니가 순수한 피해자라고 말하는 데에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아무튼 그때까지 만든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개발 비용과 생산 준비에 들인 비용 15억 엔 정도를 날렸다고 한다.
이 취소로 이데이 노부유키는 마루야마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 거냐며 크게 화를 냈고, 후에 이데이가 CEO로 취임할 때는 매우 긴장했다고 할 정도로 쿠타라기의 자리를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이후로 이런 쿠타라기 켄을 사내의 다른 간부들에게서 보호하며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그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도쿄 미나토구 아오야마에 있었던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EPIC 레코드 재팬 뉴미디어 사업부로 출향 시켰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에 대해 당시에 이미 쿠타라기에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사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쿠타라기를 총애했고, 그리고 나머지 사원들은 쿠타라기가 일 벌이면 수습하고 사과하는 노예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쿠타라기 켄이 정보처리연구소에 근무했던 시절 소니의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부카 마사루 사장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후반기까지 닌텐도와의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지지부진했고 쿠타라기는 사업보고서에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며 게임기 사업으로의 진출이라는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6월 24일에 게임기의 사업의 진퇴를 결정할 소니 그룹 최고 경영 회의에 나타난 쿠타라기 켄은 우리는 이대로 물러나도 좋습니까? 소니는 평생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라고 발언하였고, 임원들은 '소니가 져도 되는 상대는 분하지만 마쓰시타(현 파나소닉) 뿐', '교토의 화투 집에 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천하의 소니가 장난감을 만드냐' 등등 게임 사업에 잔뼈가 굵은 닌텐도에 문외한인 소니는 경쟁이 안된다며 반대를 했지만 "닌텐도에게 먹칠을 당했는데 다물고 있을 겁니까?"라고 했고 오가 노리오 사장은 "그렇게까지 말하거든 독자노선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증명해봐라. DO IT!"'이라며 승인했다는 설이 있다.
PS1
소니의 성공을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뛰어난 하드웨어, 영리한 마케팅과 함께 개발자와 서드파티 발굴을 위한 노력, CD의 채택, 닌텐도 64와 세가 새턴의 실수 등에 힘입어 피 터지게 경쟁했지만 승리는 시장에 처음 데뷔한 신인의 몫이 되었다. 개발환경, 로열티, 유통 환경 개선 등의 요소로 남코를 필두로 한 수많은 서드파티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넘어왔고, 끝끝내는 스퀘어와 에닉스가 파이널 판타지 7과 드래건 퀘스트 7을 발매하며 게임기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북미 시장에서는 닌텐도 64도 선전했지만 소니는 닌텐도도 넘지 못한 1억대의 고지를 넘으며 소니는 단숨에 콘솔 게임계의 중심축으로 발돋움한다.
PS2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플레이스테이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플레이스테이션 2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PS2는 아직까지도 콘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기로 기록되고 있다.
PS1 시기는 일본에서는 초창기에는 세가 새턴, 북미에서는 닌텐도 64가 거센 저항을 하기는 했지만 PS2 시기에는 달랐다. 드림캐스트는 PS2가 직접 찍어 눌렀고, 엑스박스는 서양 시장의 신참이었으며, 닌텐도 게임큐브는 혼자서 자폭했기에 사실상 경쟁자가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압도적이었으면 타 기종 독점작으로 발매된 대작 게임들이 예상외의 판매량 부진으로 인해 PS2로 역 이식되거나 후속작으로 PS2로 멀티 플랫폼 발매를 결정하거나 멀티 플랫폼이라도 PS2로 선행 발매될 정도였다. PS2로 역 이식된 사례는 바이오하자드 코드: 베로니카, 바이오하자드 4, 뷰티풀 죠, 테일즈 오브 심포니아, 마블 VS 캡콤 2, 벚꽃 대전 3 등이 있었고, 추후에 PS2와의 멀티 플랫폼 발매 결정이 된 사례는 데드 오어 얼라이브 2, CAPCOM VS SNK 2, 소닉 히어로즈, 소울 칼리버 2, 킬러 7, 뷰티풀 죠 2 등이 있었고, PS2로 선행 발매된 사례는 GTA 시리즈가 대표적이었다.
하나, 이때의 성공에 도취된 소니는 슈퍼 패미컴 때의 닌텐도와 같이 지나친 자만심에 빠져버리게 된다.
PS3, PSP
플레이스테이션 3 출시 초기는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무려 2000억 엔의 적자를 내고 있었고, PS3는 Wii와 엑스박스 360에게 압도당했다. 당시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3에 CELL-Broadband Engine이라는 프로세서를 탑재하기 위해 IBM과 협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시 직전이 되었는데도 CELL-BE 엔진은 예상을 한참 밑도는 처참한 성능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한 갑작스러운 설계의 변경으로 생산 단가의 상승, 물량 부족, 개발 난이도의 상승 등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PS2의 성공으로 지나친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었던 소니는 온갖 망언을 내뱉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플레이스테이션 3 문서 참조.
이 실패가 너무나 쓰라렸던 탓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쿠타라기 켄은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니는 초기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 데 실패했고 7세대 중후반부가 오기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CELL-BE 프로세서 사용에 개발자들이 익숙해지고, 목숨을 건 원가절감과 무리하다 싶을 만큼 강력한 독점작/퍼스트 파티 타이틀 강화 정책으로 인해 마지막에는 엑스박스 360의 판매량을 따라잡으며 그리 나쁘지 않은 콘솔로 남는 데 성공한다.
한편 소니는 7세대 초기 닌텐도를 세가처럼 시장에서 완전히 몰아낼 준비를 하기 위해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PSP라는 괴물을 투입했으나, 불법 복제로 인해 세대 내내 문제에 시달렸고, 결과적으로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절대강자 닌텐도를 주춤하게 했다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닌텐도를 몰락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8000만 대라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데는 성공했기에 여전히 닌텐도를 제외한 휴대용 게임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기기로 남아있다.
PS4, PS Vita
플레이스테이션 3 출시 초기는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무려 2000억 엔의 적자를 내고 있었고, PS3는 Wii와 엑스박스 360에게 압도당했다. 당시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3에 CELL-Broadband Engine이라는 프로세서를 탑재하기 위해 IBM과 협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시 직전이 되었는데도 CELL-BE 엔진은 예상을 한참 밑도는 처참한 성능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한 갑작스러운 설계의 변경으로 생산 단가의 상승, 물량 부족, 개발 난이도의 상승 등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PS2의 성공으로 지나친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었던 소니는 온갖 망언을 내뱉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플레이스테이션 3 문서 참조.
이 실패가 너무나 쓰라렸던 탓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쿠타라기 켄은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니는 초기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잡는 데 실패했고 7세대 중후반부가 오기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CELL-BE 프로세서 사용에 개발자들이 익숙해지고, 목숨을 건 원가절감과 무리하다 싶을 만큼 강력한 독점작/퍼스트 파티 타이틀 강화 정책으로 인해 마지막에는 엑스박스 360의 판매량을 따라잡으며 그리 나쁘지 않은 콘솔로 남는 데 성공한다.
한편 소니는 7세대 초기 닌텐도를 세가처럼 시장에서 완전히 몰아낼 준비를 하기 위해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PSP라는 괴물을 투입했으나, 불법 복제로 인해 세대 내내 문제에 시달렸고, 결과적으로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절대강자 닌텐도를 주춤하게 했다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닌텐도를 몰락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8000만 대라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데는 성공했기에 여전히 닌텐도를 제외한 휴대용 게임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기기로 남아있다.
2.5. PS4, PS Vita 시기[편집]
플레이스테이션의 제3의 전성기, 하지만 휴대용 게임기에서 패배를 선언하다. 2019년 기준으로 PS4 [5]가 전 세계 누적 판매량 1억 280만 대를 돌파했다. 이로써 PS3를 제외한 모든 거치형 게임기가 1억대에 돌파했다.
PS4의 시장 흥행 성적은 압도적이다. 소니는 PS3 시절의 자만에 반성하고, PS4를 설계할 시점부터 여러 개발사들에게 의견을 물어 가며 개발을 시작하였다. 반면 엑스박스 원은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 3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지나친 자만심으로 인해 초기 시장 행태에서 정신이 나간 듯한 면모를 보여주며 자멸을 택하였고, Wii U는 일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완전히 실패하여 시장에서 참패함으로써 사실상 PS4 천하가 되어버렸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PS4가 갖는 의미는 더욱 큰데,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전 대표이사 카와우치 시로의 공격적인 현지화 정책으로 인해 그야말로 대 한글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PS3 시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게임들의 한국어 버전이 속속 발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PC 게이밍 문화가 발달한 국내에서는 오히려 플스의 경쟁자로 엑스박스 원이 아닌 PC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스팀의 발달로 많은 개발사들이 PC로 게임을 동시 출시하는 정책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PS4는 걸출한 독점작과 함께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현세대에서 가장 성공한 콘솔로 남는 데 성공한다. 8세대 초기~중후반기까지의 PS4의 흥행은 압도적이었으나, 후반부 이후 8.5세대 계열 게임기들이 나온 이후로는 약간 수그러든 듯한 분위기. 엑스박스 원은 정신을 차리고 현세대에서 가장 강력한 콘솔인 엑스박스 원 X를 내세워 상당한 흥행을 보여주고 있으며 [6], 닌텐도는 하이브리드 기기인 닌텐도 스위치로 Wii U의 실패를 덮을 정도의 빠른 흥행 기록을 세워나가는 중이다. 이에 질세라 PS4의 경우 주변 기기와 강화 기기로 각각 플레이스테이션 VR과 플레이스테이션 4 프로를 내세웠으며, VR의 흥행은 생각보다 못 미더웠지만 프로는 괜찮은 판매량을 보였다.
8.5세대 이후 다른 콘솔 회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지만, PS4의 시장 장악력은 여전한 편이다. 아직까지도 현세대 콘솔 게임계는 PS4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이때쯤 타 콘솔과의 크로스 플레이 거부로 논란이 일었다. PC나 모바일 등 타 콘솔 이외의 플랫폼과는 크로스 플레이를 멀쩡하게 지원하지만, 닌텐도 스위치와 엑스박스 원이 마인크래프트, 포트 나이트, 로켓 리그 등으로 서로 크로스 플레이를 지원하는 동안 혼자 거부한 것. [7] 남 좋은 일 해주기 싫어서 거부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시답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소니는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포트 나이트 유저들의 비판이 거셌다. 하지만 얼마 후 소니가 크로스 플레이 허용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PS Vita는 흥행에서 대패하였다. 초기에는 우수한 성능과 고급 게임들로 닌텐도의 신형 기기 닌텐도 3DS와 경쟁하였으나, 소니는 PS4에 집중하기 위해 비타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1700만 대라는 매우 저조한 흥행을 보여주어 시장에서, 특히 서양에서 대패하였다. 반면 경쟁기기인 3DS는 우수한 게임들과 독점작으로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생존하여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닌텐도 스위치로 확인사살을 당한 어쩌면 참 비운의 콘솔. 포스트 PSP를 노리고 탄생하였으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나마 일본과 대한민국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아주 조금 흥행한 것이 사소한 위안이었으나 결국 2019년부터 PS Vita의 생산 종료를 발표했다.
흥행과 무관하게 이번 세대는 주 소비자층의 평균 연령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의 플레이스테이션 4 광고는 결혼 적령기인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 사이의 소비자를 주 타깃으로 광고를 찍는 것을 볼 수 있고 TV 광고도 잘하지 않는다. [8] 미국의 플레이스테이션 4 광고 역시도 대학생 내지는 젊은 성인층을 주 모델로 하는 광고가 주를 이루고 있다. 어린 세대가 새롭게 등장한 모바일 게임 쪽으로 방향을 돌리며 새로운 유입은 적어지고 기존의 소비자 층이 유지되고 있다. 세대 동결로 인한 레드오션화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가 차세대 트리플 A 업계의 최대의 과업이 될 것으로 점쳐지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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