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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추억이 담긴 가정용 닌텐도 게임기

by 만물을 깨닫는 힘 2021. 1. 9.

컬러 tv 게임

 

닌텐도와 미쓰비시에서 공동 제휴하여 1977년부터 발매한 닌텐도의 첫 번째 가정용 게임기이다. 콘솔 게임계의 역사로 따지면 1세대 후기 정도에 해당되는 게임기이다.

게임은 본체에 내장된 롬에 기억되어 있으므로 후계 기종인 패밀리 컴퓨터처럼 게임 카트리지의 교환으로 다른 게임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새로운 종류의 게임을 내려면 새로운 게임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는 게임 & 워치에도 적용된 방식이었다.

1978년에 발매된 컬러 TV 레이싱 112까지는 미쓰비시와의 공동 개발이지만, 컬러 TV 레이싱 112를 개발하면서 미쓰비시 기술자에게서 많은 기술 전수를 받은 이후 1979년에 출시된 컬러 TV 게임 블록 깨기 게임기부터는 닌텐도가 독자적으로 설계해 출시할 수 있었고, 게임 & 워치를 거쳐서 닌텐도가 게임기 시장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기까지의 토대를 만든 숨겨진 첫 작품이다. [1]

그 당시에 마쓰시다 전기산업도 2만 엔대 게임기 개발을 검토했으나 닌텐도의 9,800엔 컬러 TV 게임 6 출시를 보고 포기했으며,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여러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던 가운데 이 게임기의 성공으로 닌텐도 자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후속 기기는 그 유명한 패밀리 컴퓨터.

여담으로, 도라에몽 19권의 '산타의 굴뚝' 에피소드에서 노비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빠 노비 노 비스케에게 TV 게임을 사달라고 조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게임기가 바로 이것이다.

1980년에 단종되었으며, 하드웨어의 총합 판매량은 300만 대이다.

 

패밀리 컴퓨터

 

닌텐도의 첫 번째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비디오 게임기이다. 그리고 아타리 쇼크 이후 게임업계를 살린 전설적인 게임기로도 평가된다. [7]

일본 동시 출시 게임은 동키콩, 동키콩 Jr, 뽀빠이 3종류이며, [8]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일본 출시는 1985년 9월 13일이고, 이 게임의 동시 출시는 북미에서 이뤄졌다. 여담으로 젤다의 전설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과 동시에 발매되었다.

2003년 9월 25일, 발매한 지 20년 이상 흘렀던 시기에 닌텐도에서 슈퍼 패미컴과 함께 공식 단종을 선언했다. 닌텐도가 발표한 패밀리 컴퓨터/NES의 전 세계 누계 판매 대수는 6,191만 대이며,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4,024만 장의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이다.

 

1983년 7월 15일, 일본에서 패밀리 컴퓨터로써 처음 발매되었고, 북미에서는 1985년 10월 18일에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고, 유럽에서는 1986년 9월 1일에 북미판과 같은 이름으로 발매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에 현대전자에서 북미판인 NES를 "현대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였다.

패밀리 컴퓨터의 약칭은 "패미컴(ファミコン)"과 "FC"이고,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의 약자는 "NES"이다. [9]

자사의 히트 아케이드 게임 동키콩을 뛰어난 품질로 이식하여 초반에 인기를 끌어모았고, 이후에도 허드슨이나 남코 등의 서드파티들이 참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로 사회현상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 또한 젤다의 전설, 드래건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록맨 등 패미컴만의 뛰어난 오리지널 게임들이 나오면서 역사상으로 매우 성공한 게임기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나 서드파티 비즈니스의 기준을 확립하여 현재 게임기 산업 구조의 표준을 구축해 놓기도 했다. [10] 명실상부한 1980년대의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봐도 부족하지 않다.

전 세계에 6,191만 대를 판매했으며, 일본에 1,935만 대, 북미/남미에 3,400만 대, 기타 지역에 856만 대를 판매했다.#

가격이 오르는 것을 감수하고 튼튼한 ABS수지[11]로 만들었다. 반대로, 가격 절감을 위해 패드는 본체에 부착되도록 했다. 색깔은 흰색과 빨간색인데, 빨간색은 패미컴 개발 당시에 사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와 비슷한 색으로, 그가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한동안은 세이브 시스템이 없어서 패스워드를 제공해 입력하는 방식의 간이 세이브를 해야만 했다. 마스크 롬에 추가로 SRAM을 붙이기 쉽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1986년에 나온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덕분에 편리하게 세이브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디스크 시스템은 일본에만 출시된 데다가 1987년에는 배터리 백업 시스템이 등장하게 되었다.

2018년에 35주년을 맞았다.

 

슈퍼 패미컴

 

닌텐도에서 개발한 가정용 16비트 게임기. 뛰어난 성능으로 수많은 명작을 배출해낸 명기.

패밀리 컴퓨터의 후계기종으로서,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와 비교해서는 후발주자이지만 패미컴 시절에 쌓은 든든한 서드파티 인맥은 이 게임기로도 이어져서, 드래건 퀘스트 시리즈와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록맨 시리즈[4]는 이 게임기로 계속 나오기에 이르렀다.

2003년 9월 25일 단종되었다. 그때까지 게임기 판매 대수는 4,910만 대.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2,061만 장의 슈퍼 마리오 월드이다.

2020년 11월 21일 첫 발매된 지 벌써 30주년을 맞이했다.

 

1987년 9월 9일 야마우치 히로시 당시 닌텐도 사장은 교토신문을 통해 패미컴의 후속기, 슈퍼 패미컴을 최초로 언급했다. 따라서 이 당시부터 슈퍼 패미컴의 개발에 들어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이후에도 1988년 일본의 주간 잡지였던 'TOUCH'에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드래건 퀘스트 5는 슈퍼 패미컴에 내놓을 예정이라는 답변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드래건 퀘스트 3 발매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드래건 퀘스트 4에 대해서도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88년 11월 21일 닌텐도는 본사에서 슈퍼 패미컴 개발을 최초로 발표했고, 콘셉트 목업을 공개했다. 당시 아케이드 기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확대, 회전 기능은 뿐만 아니라 페이드 인 아웃, 4 화면 스크롤링, 색상 수 증가로 가능하게 된 미려한 표현, 샘플러 기반 사운드 시스템 등을 구동할 수 있는 고성능 기기임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이날 슈퍼 패미컴을 1989년 7월에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89년 7월 28일, 닌텐도는 갑작스럽게 출시를 1년 이상 연기했다. 256 KB(2 Mbit) 마스크 롬과 SRAM 등 반도체 생산 부족으로 인한 단가 문제 등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이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의 공식 후속작인 슈퍼 마리오 월드의 개발 계획을 공개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슈퍼 패미컴을 1년 뒤인 1990년 11월 21일에 소비세 포함 2만 5천 엔의 가격으로 출시했고, 3개의 동시 발매 작인 슈퍼 마리오 월드, 파일럿 윙즈, F-ZERO가 공개됐다. 또한 1991년 1월부터 1개월씩 새로운 젤다의 전설 시리즈, 심시티를 출시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 저 중 파일럿 윙즈는 약속일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 출시됐고, 1991년 1월부터 나온다는 두 게임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3년간의 긴 기다림 끝에 약속했던 날짜였던 1990년 11월 21일, 일본에 발매되었고, 북미에는 1991년 8월에 슈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Super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약칭 SNES [10]), 유럽에는 1992년에 북미판과 같은 이름으로 발매하였으며, 대한민국에는 1992년 11월에 현대전자에서 '현대 슈퍼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였다. 유럽에서는 흔히 '슈퍼 닌텐도(Super Nintendo)'로 줄여서 부른다.

일본의 경우에는 주력은 RPG였지만 RPG뿐 아니라 다른 장르도 골고루 출시되어, 스피드 한 액션이 중심을 이룬 메가 드라이브와 RPG가 주류를 이룬 PC 엔진보다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1992년에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당시 3파전 가운데 가장 먼저 이식되어 일본에서 메가 드라이브와 PC 엔진을 격침한 계기가 되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하려고 슈퍼 패미컴을 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슈퍼 패미컴에 신규 유저를 끌어들이는 데 공헌했고, 일본 내에서의 흥행은 떠도는 자료에 의하면 출하량 288만 개 정도로 일본 내의 모든 슈퍼패미컴 게임을 통틀어 5위라고 한다. [11]

반면 북미의 경우는 북미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전 세대 기기 NES와 달리,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 토머스 칼린스 키의 진두지휘로 소닉 더 헤지혹, 존 매든 풋볼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제네시스 킬러 타이틀 게임과 가격 공세로 SNES는 일본에 비해선 고전하고 있었다. 오히려 NES의 수명이 꽤 오래간 덕분에 게임기를 새로 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SNES의 발목을 잡았을 정도였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는 연말 상전의 승리를 경쟁 게임기인 세가의 제네시스에 내줘야 했다. 그러나 1993년부터 세가의 차세대 게임기인 세가 새턴의 출시 계획이 알려지기 시작한 반면에 SNES의 수명은 1995년까지 계속됐고, 1994년 11월 21일 동키콩 컨트리가 북미 시장에서 대박을 터트리고, 1995년 이후로도 차세대 기기인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 사이에서 꽤 오랫동안 버틴 덕분에 최종 판매량은 SNES가 제네시스를 역전하는 데 성공했다. 정작 세가 새턴은 북미에서 메가드라이브의 영광을 계속 누리고 싶었던 미국 지사가 개발한 슈퍼 32X와 팀킬을 당해서 재미를 못 봤다.

전 세계에 4,910만 대가 팔렸으며, 이 가운데 북미/남미에는 2,335만 대, 일본에는 1,717만 대, 그 밖의 지역에는 858만 대가 팔렸다. 

 

닌텐도 64

 

닌텐도에서 출시한 4번째 가정용 게임기다. 경쟁 기종은 세가 새턴, 플레이스테이션. 약칭은 N64.

한국에는 현대전자에서 1997년 7월 19일에 '현대 컴보이 64'라는 이름으로 정식 판매했으나 얼마 못 가서 왕자의 난과 IMF 외환위기로 인해 현대전자 자체가 공중분해되어 1998년 여름까지 4개의 게임만을 발매했다. [4] 슈퍼 패미컴 때처럼 게임 내용은 북미판, 게임 카트리지 형태는 일본판과 같다.

 

개발 코드명은 '프로젝트 리얼리티'로서 실리콘 그래픽스 측이 제안한 물건이다. 본래는 세가와 함께 개발하기로 했지만 일본 세가 측이 이를 걷어차 버렸다.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 토머스 칼린스 키는 이를 대신 이어받을 사람이 있다며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를 소개해 주었고, 이것이 닌텐도 64로 이어졌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이 주장에 대해 닌텐도는 부정했다. 실리콘 그래픽스가 세가 대신 닌텐도를 선택한 것은 칩의 기술에 대해 세가가 독점권을 요구한 반면, 닌텐도는 비독점적이었기 때문에 실리콘 그래픽스에게 닌텐도가 좀 더 매력적인 사업 파트너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닌텐도의 지원 하에 울트라 64의 데모 격으로 레어가 미드웨이와 협력하여 닌텐도 64 기반 아케이드 기판을 만들어(당시에는 울트라 64 명의), 그 기판에 킬러 인스팅트를 제작하여 닌텐도 64로의 완전 이식을 전제로 출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게임을 구동하면 닌텐도와 울트라 64의 로고가 번쩍번쩍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아케이드 기판은 남코의 시스템-플레이스테이션처럼 호환 관계가 아닌 그저 MIPS R4600 CPU를 사용하며 닌텐도 64의 파일 포맷과 데이터 구조를 사용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판이하게 다른 기판이었다. 그래서 그 게임은 SNES로도 이식되기도 했다. 비슷한 경위로 제작된 크루징 USA 게임 역시 울트라 64 기판을 사용한다고 알려졌지만 미드웨이 V 유닛이라는 시스템을 사용한다. 실제로는 최강 하부 쇼기를 제작한 당시 닌텐도의 실질 세컨드 파티였던 SETA의 Aleck 64라는 아케이드 기판이 닌텐도 64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게임은 약 10여 종 대부분 퍼즐류만 나왔다.

아무튼 제임스 클라크 실리콘 그래픽스 사장이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 사장을 만나 개발 계약을 맺어 1993년 초부터 닌텐도 64 개발을 시작했다. 1993년 8월 23일, 닌텐도의 차세대 게임기 개발을 위해 닌텐도와 실리콘 그래픽스가 64비트 MIPS CPU를 넣어 250달러 미만의 게임기를 개발하기로 상호 계약을 맺었다고 언론에 보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닌텐도 64가 CD가 아닌 롬 카트리지 기반 시스템으로 개발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게임 언론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저들끼리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에 대해 하워드 링컨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사장은 롬 카트리지는 CD보다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 속도가 빨라 쾌적하기 때문에 탑재한 것이라 해명하기도 했다.

1994년 6월 23일, 닌텐도는 이 게임기의 가명을 <울트라 64>로 명명했다. 그리고 닌텐도는 SGI, 레어, 타임워너, 어클레임 등등의 엘리트 게임 회사들과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를 두고 닌텐도는 <드림팀>이라 불렀다. 그리고 게임기의 목업과 롬 카트리지 디자인 등을 그즈음에 공개했다. 1994년 10월 15일, 초심회 전시회에서는 데모 영상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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